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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포츠뉴스 김예나 기자] E채널 ‘탑골랩소디’가 탑골 가요의 글로벌 잠재력을 입증하며 10주 간의 여정을 끝냈다. 해외 각국에서 온 5여 명 글로벌 싱어들의 감동적인 스토리와 K-POP을 향한 사랑이 많은 시청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기며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다. 

E채널 ‘탑골랩소디: K-POP도 통역이 되나요?'(이하 ‘탑골랩소디’)가 지난 4일 막을 내렸다. ‘탑골랩소디’는 한국인보다 더한 열정으로 K-팝을 사랑하는 외국인들을 위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1980~90년대 탑골 가요의 1절은 한국어로 부르고, 2절은 각자의 국가 언어로 번안해 불러 경연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돼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선사했다. 

프로그램 종영 후 서울 마포구 티캐스트 상암 캠퍼스에서 엑스포츠뉴스와 인터뷰를 가진 제영재 PD는 “지난 10주 간 많이 사랑해주신 시청자분들과 어려운 여건 가운데 함께 고생해주신 제작진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인사를 전했다. 

제영재 PD는 무엇보다 코로나19 사태 속에서 글로벌 출연진들과 함께하기 위한 여정을 기획하고 진행해오기가 쉽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그는 “코로나19 때문에 기획 단계에서 생각했던 부분들이 많이 틀어졌다. 처음 구상했던 콘셉트나 그림과 많이 달라져서 아쉽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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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당초 경연 참가자들이 각자 고향으로 가서 노래를 홍보한다거나 해외 각국에서 출중한 실력자들을 한국으로 데려와 경연에 참가하는 설정이 기획 단계에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불발되면서 해외 촬영 분량이 대폭 줄어들었단다. 이로 인해 국내 스튜디오 촬영 비중이 늘어났고, 이를 위해 연예인 패널들의 비중이 크게 커졌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이상민, 채정안의 2MC를 비롯해 세븐, 혜림, 이지혜, 나르샤, 샘해밍턴, 황제성, 뮤지, 주영훈, 김현철, 이건우 등 국내 내로라하는 스타들의 활약이 컸다. 각 분야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있는 대세 스타들이 총출동한 ‘탑골랩소디’ 캐스팅은 제영재 PD의 공이 컸다. 그는 “다들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맺어온 분들이다 보니까 제안했을 때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다.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애정이 큰 분들이다 보니까 프로그램 콘셉트에 대한 만족도가 컸다”고 밝혔다. 

특별히 제영재 PD는 이상민, 채정안 2MC가 보여준 역량 이상의 활약에 높은 만족도를 표했다. 그는 “이상민 씨는 프로그램을 녹화할 때 힐링 받는다고 했다. 채정안 씨도 평소 예능 출연을 희망하다가 때마침 좋은 제안을 받았다고 하더라. 또 예전 가수 활동 시절을 흑역사로 여기지 않고 좋은 추억으로 생각하는 분이라 더 좋은 기회였다. 이상민 씨와 채정안 씨가 오래 전 친분이 있다가 오랜만에 만난 자리였는데 공백이 무색할 만큼 좋은 호흡을 보여줬다”고 칭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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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MC뿐 아니라 다른 여러 연예인 패널들도 ‘탑골랩소디’ 안에서 저마다 좋은 활약을 펼치며 프로그램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 제영재 PD는 “연예인 패널들 모두 각자 자신의 포지션에서 ‘내가 아니면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책임감을 갖고 열심히 임해주셨다. 매 녹화가 끝나면 누가 얘기하지도 않았는데 꼭 회식까지 이어졌다. 출연진들이 일하러 오기 보다 진심으로 녹화를 즐긴다는 게 느껴졌다”며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어 “그만큼 다들 프로그램에 대한 애정이 컸던 것 같다. 마지막 녹화 때 정말 많이 아쉬워했다. 아직 내부 평가 및 정리 등을 거쳐봐야 시즌2의 디테일한 계획을 세울 수 있겠지만 다음 시즌을 하게 되면 지금의 출연진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덧붙였다. 

[경향신문]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황이 급박했던 1950년 7월25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장 유물 중 금관 등 금관총 출토유물 15점 등 139점이 대구로 이송되어 그곳의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로 소개됐다. 국방부 제3국장인 김일환 대령이 최순봉 국립박물관 분관장으로부터 유물을 인계받아 대구로 이송했으며, 당시 최순주 재무부장관이 인수했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일화 1> “미국의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 유물을 송두리째 약탈했다”. 한국전쟁 도중 동베를린 영화관에서 구 소련 측이 방영한 뉴스였다. 경복궁 내 국립박물관 진열실의 텅빈 모습을 보여주고 ‘미군의 약탈’ 운운하며 맹렬히 비난한 것이다.

<일화 2> “저게 대체 어찌 된 것인가”. 1957년 9월 한국을 방문한 월남(베트남)의 응오 딘 지엠 대통령(재임 1956~1963)과 경복궁 산책에 나선 이승만 대통령(재임 1948~1960)의 얼굴이 싸늘하게 변했다. 한국전쟁 중 공습을 받아 1만2000 조각으로 파괴·방치된 탑 1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다름아닌 외국정상과 거닐다가 보았으니 얼마나 큰 망신인가. 이 탑이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국보 제101호)이다.

1950년 7월27일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이 작성한 2차 미국 소개 유물 124점 목록. 금동미륵반가상 등과 ‘두 귀 달린 청자 긴목항아리’ 등 다양한 유물들이 포함됐다. |국립경주박물관 제공
다들 한국전쟁으로 피아간 엄청난 인명손실이 났다는 사실은 안다. 그러나 지광국사 현묘탑처럼 수백 수천년 이어온 문화유산의 피해 또한 만만치 않았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또 전쟁이 발발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길에 오른 것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2만점에 가까운 문화유산이 ‘전격 비밀 소개(疏開) 작전’을 펼쳐 부산 피란길에 올랐고, 그 중 일부가 전쟁 초기에 일찌감치 바다건너 미국으로 이송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다. 7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상징은 역시 1921년 출토된 금관 등 금관총 유물이다. 조선총독부는 경주 지방의 들끓는 여론에 밀려 금관총 출토유물을 서울로 가져오지 못했다. 경주에서는 지역민들의 십시일반 성금이 모여 박물관을 지었는데, 그것이 국립박물관 경주분관(현 국립경주박물관)이었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 문화재를 지켜라!’

바야흐로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7월 25일이었다. 북한군의 공세에 낙동강 전선까지 밀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에 손님이 찾아왔다. 국방부 제3국장 김일환 대령이었다.

“경주 분관에 소장된 주요 국보를 소개(疏開·분산 이동)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긴급 지령으로 왔습니다.”

최순봉 당시 경주분관장으로서는 일순 당황했다. 현역군인이 갑자기 나타나 유물을 내놓으라는 것이니…. 그러나 자초지종을 듣고나니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었다. 국립박물관 서울본관은 물론 개성·부여·공주분관은 이미 북한군 치하에 놓여있었고, 온전한 곳은 경주 분관 뿐이었다. 만약 경주까지 잃게되면 국립박물관의 모든 소장유물은 북한의 소유로 넘어가는 꼴이었다.

미국으로 소개되는 경주 유물 중에는 1942년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 해체수리 공사때 나온 사리함에서 발견된 순금제여래 좌상과 입상이 포함됐다.|국립경주박물관 제공
경주분관 직원들은 부랴부랴 중요 소장유물들을 챙겼다. 맨먼저 금관 등 금관총 출토 유물을 골랐다. 왜 하필 금관총 유물인가.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 등은 일제강점기인 1921년 국내에서 최초로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이다. 조선총독부는 당초 금관총 출토 유물들을 서울로 옮길 작정이었다. 그러나 경주 여론이 들끓었다. 신라 건국의 토대가 된 박(朴)·석(昔)·김(金)씨와 이(李)·최(崔)·손(孫)·정(鄭)·설(薛)·배(裵)씨 가문대표가 모여 금관총 유물의 경주 소장 및 전시를 촉구했다. 대대적인 시민대회가 열렸고, 시민대표 10여명이 총독부를 항의 방문하기도 했다. 1923년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금관총 유물을 소장·전시할 박물관을 건립했는데, 이것이 바로 경주박물관 분관이다. 이후 금령총(1924년)·서봉총(1926년)에서도 금관 등 황금제 유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금령총·서봉총 유물은 모두 서울로 옮겨졌고, 금관총 유물은 경주분관의 상징으로 남게 됐다.

임금의 편전이던 사정전과 부속건물인 만춘전, 대비의 침전이던 자경전 등은 국립박물관 진열 및 수장공간으로도 쓰였다. 그 건물들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24일 서울 수복작전 도중 최소한 6발의 포·폭격을 맞아 붕괴되거나 대파됐다. 건물 안에 진열되어 있던 유물들도 파괴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금관총 금관의 미국피란기

따라서 미국 피란길에 나설 문화재는 당연히 금관총 유물 등이 첫손가락으로 꼽힐 수밖에 없었다.

당시 경주분관이 작성한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소개물 목록’을 보면 25일 선정된 ‘제1급품’은 15점에 달했다. ‘금관총 금관’(국보 제87호)과 ‘순금제 허리띠’(국보 제88호), ‘순금제 귀고리’, ‘순금제 가락지’, ‘굽은 옥’과 ‘옥피리’, ‘은제 주발’ 등이 포함됐다. 1942년 경주 황복사터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발견된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 등도 선택됐다.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당시 경주분관이 경황이 없는 와중에서 순금제 위주로 피란유물을 우선 선택한 것 같다”고 해석했다.

조선시대 대비의 침전이었고, 국립박물관 진열 및 수장공간으로 쓰인 자경전도 폭격으로 파괴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틀 뒤인 27일 김일환 대령이 다시 찾아왔다. 경주분관 직원들은 2순위, 즉 ‘제2급품’ 124점을 골랐다. 제2급품은 금동미륵보살반가상과 금동석가여래 좌상, 금동입상, 사천왕상 등 불상 및 불교조각, 두 귀 달린 청자 긴목항아리, 청자 국화형 그릇(청자국화형합), 청자 상감 구름 학 무늬 사발 등 청자 등이 포함됐다. 김일환 대령은 1차에 이어 2차로 선택된 유물들까지 대구 한국운행으로 이송했다. 139점의 유물은 역시 대구 피란 중이던 한국은행 금괴와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로 공수됐다.

이 소개작전으로 미국에 가있던 139점 중 금관총 유물과 황복사터 불상 등은 1957년 12월부터 미국 8개 도시를 순회하며 열린 최초의 해외전시(<한국국보전>)에 출품된 뒤 다른 전시품들과 함께 7년 여 만에 귀환했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은 강원 원주 폐사지에 있다가 1911년 일본으로 반출된 뒤 10여차례 이전을 거듭하고, 한국전쟁 때는 직격탄을 맞아 산산조각 나는 비운을 겪었다. 경복궁내 진열본관도 대파됐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유물을 포장하라!”

그렇다면 서울의 국립박물관 본관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때의 국립박물관장은 김재원(1909~1990)이었다. 김재원 관장은 독일 뮌헨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미술사학자였고, 1948년 4~12월 사이 미국내 여러 박물관을 방문하고 돌아온 국제통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직후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정부 요원 대부분은 한강을 건너 피란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국립박물관 직원 누구도 ‘피란하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없었기에 전원 잔류했다. 박물관에 인공기가 걸렸고, 김용태라는 사람이 북한 내각 직속의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 위원장이라며 나타났다.

경복궁 경내는 1950년 한국전쟁 때 치열한 서울 수복 작전의 와중에서 최소한 6발의 포탄과 폭탄을 맞았다.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국립박물관 아카이브 기행-16’, <박물관 신문> 2019년 4월호에서
김재원 관장의 직책은 박탈됐다. 박물관을 접수한 북한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는 7월 중순 제1순위에 속하는 진열품을 시외로 모두 소개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박물관 직원들은 “그 경우 유물의 안전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극력 반대했다.

그 반대가 통했다. 국립박물관 소장 유물 중 1급에 해당되는 금속과 토·도기, 옥석·목칠·서화 등 총 1228점의 유물(상자 69개 분량)을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이 벌어져 전세가 역전되고 유엔군이 서울로 접근해오자 박물관도 분주해졌다. 위원장인 김용태가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의 유물, 그리고 간송 전형필(1906~1962)의 개인소장품 등을 모두 포장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철수 때 북한으로 가져간다는 것이었다.

1950년 10월5일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이 경무대 경찰서장에게 보낸 ‘박물관 소장 진열품 수호 보관에 관한 문건’. 북한 치하에서 박물관 요원들이 “박물관 유물을 모두 포장하라” “중요유물은 외곽으로 소개하라”는 북한 물질문화보존연구위원회의 지시를 갖가지 이유로 지연시킨 사연을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문건은 “결국 괴뢰기관(북한 물질문화보존연구위원회)가 아군(국군과 유엔군)의 격렬한 포성에 경악해서 도주함으로써 유물수호작전은 성공을 거두었다”고 기록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숨막히는 지연작전

이때부터 박물관 요원들의 암묵적인 지연 작전이 시작됐다. 덕수궁 미술관 지하창고에 보관된 유물 중 최상품을 따로 포장해서 소개하라는 지시에 “시내 최고의 안전지대로 인정되는 종묘 안에 방공 지하실을 구축해서 그 안에 보관하자”고 주장함으로써 시간을 끌었다. 실제로 지하실 구축 공사에 착수하면서 시일을 지연시켰다. 또 포장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물 5개를 포장하는데 사흘이 걸릴 정도로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포장이 다 끝나면 ‘아차! 유물목록을 써야하는데 그만 빠뜨렸네!’ 하면서 풀렀다가 포장하기를 반복했다.”(김재원의 <박물관과 한평생>·1992)

1950년 11월30일 백낙준 문교부장관이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에게 보내는 영문편지. 소장품의 소개(피란)을 허거하는 편지이다. 공문이 아니라 편지, 그것도 국문이 아닌 영문으로 작성했다. 정식 결재 계통을 밟을 경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염려가 작용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고려자기 싸는 데는 종이가 많이 필요하다느니, 회화는 습기가 들지 않아야 한다느니, 불상은 머리부분이 떨어질 수 있다느니 하는 등의 갖가지 이유를 댔다. 그렇게 포장된 유물을 궤짝에 넣어야 했다. 그러나 전쟁 중에 궤짝을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판자를 사서 상자로 꾸며야 한다”며 하루를 더 소비했다. 여기에 “목수가 없다” “못이 없다”고 또 시간을 끌었다. 그렇게 시간을 끈 이는 훗날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를 쓴 미술사학자 최순우(1916~1984)와 이화여대 박물관 고문역을 지낸 장규서였다.(김재원의 <경복궁야화>·1990)

9월24일 새벽부터 유엔군과 한국군이 도심 진출을 시도하자 다급해진 북한의 김용태 물질문화연구보존회 위원장이 동료들과 함께 도주했다. 당시 국립박물관 박물감(학예연구관)이었던 황수영 전 동국대총장(2018~2011)은 “김용태 등이 도주하면서 박물관 수장고 열쇠를 나에게 주고 떠났다”고 회고했다. 김용태의 입장에서는 지연작전을 펼친 박물관원들을 괘씸하게 여겨 골탕먹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름 ‘쿨’하게 떠난 셈이다. 북한군이 후퇴하자 유물을 지켜낸 박물관 요원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950년 12월 벌어진 유물의 전격 비밀 소개 작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당시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이었던 유진 크네즈(왼쪽)였다. 크네즈는 “유물 이송을 도와달라”는 김재원 관장의 부탁을 듣고 트럭과 열차 수송을 도맡아했다. 미국 정부의 허락도 얻지 않았지만 징계를 무릅쓰고 도왔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공습에 파괴된 경복궁과 박물관 유물

그러나 적 치하에서 벗어났다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9월 24일 새벽부터 미 해병과 한국군이 서울 서측방의 연희고지 능선(안산과 연희동 104고지 사이)을 차지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벌였다. 서울 탈환의 최대고비이자 격전지였던 이 전투에 맹렬한 포격과 공습이 수반됐다. 1963년 국립박물관이 작성한 문건(‘첩보조사보고지시’)은 “국립박물관 등을 장악하고 있던 괴뢰기관(북한의 물질문화연구보존위원회)이 도주한 1950년 9월 24일 경복궁 경내에 6발 이상의 폭탄이 공중에서 투하됐다”고 기록했다. 기사의 첫머리에 인용한 지광국사 현묘탑도 이때의 공습으로 완전히 파괴된 것이다. 그 뿐이 아니었다.

1950년 12월2일 김재원 관장이 연합군최고사령부 민간교육정보국의 미술 및 기념물 부서의 과장 조지 케이트에게 보낸 편지. 만약 한국전쟁이 확전되거나 제3차대전으로 비화할 경우 한국문화재의 국외반출을 원한다고 했다. 그러나 수송수단이 없으므로 도와달라고 했다. |김리나의 논문(‘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피난사’)에서
훗날 박물관이 작성한 ‘첩보조사보고지시’(1963년)와 ‘유물정리사무지연의 요인’(1957년 이후), ‘국립박물관 소장품 정리상황통계표’(1959년 10월5일) 등에 따르면 박물관 건물로 쓰이던 진열본관, 사정전(임금이 정사를 펼치던 편전)과 그 부속건물인 만춘전, 자경전(대비의 침전), 신창고 등이 피격됐다.

도자와 목공, 회화, 의상 등의 유물을 보관한 만춘전은 직격탄을 맞아 괴멸됐고, 활자와 무기, 무구(武具) 등을 보관하던 만춘전 회랑도 지근탄(가까운 곳에서 쏜 탄환)을 맞아 대파했다. 또 임금의 편전이자 박물관 건물로 쓰일 때는 도자기와 목공을 보관하던 사정전과, 각 시대의 토기와 도기, 와당 등 발굴품을 보관하던 사정전의 회랑 및 창고도 역시 크게 파괴됐다. 발굴품과 토기·도기 그리고 회화와 탁본을 보관중이던 신창고 역시 포탄이 명중했다. 중앙아시아 유물과 서화, 도자 및 귀중품이 보관되어 있던 본관 창고도 크게 부서졌다.

전쟁이 확전될 경우 한국문화재를 미국에 옮기게 해달라는 한국측 요청에 미국은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1951년 2월9일자 미 국무부가 보낸 전문(왼쪽)에는 “운송과 보험비용이 많이 들고 현재의 포장상태로는 미국까지 가기가 적합치 않다”고 했고, 2월21일 딘 에치슨 미국무장관(1893~1971)이 주미대사관에 보낸 전보(오른쪽)는 “한국 문화재를 해외로 옮길 경우 안전의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김리나의 논문에서
■1급 유물이 공습에서 비껴난 이유

이 피격으로 인한 문화재의 피해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진열관 뒤에 북한군이 죽어 있었다. 만춘전에 소장된 의상이 전멸됐고, 대형 티벳금동라마불상이 완전 파괴됐다. 또 중앙아시아 유물 중 미라 1구가 부서져 흩어져 있었다. 이 미라는 전쟁직전 전시되어 수천명의 관람객이 구경했던 것인데….”(김재원의 <경복궁야화>·1990)

9·28 수복 후 경복궁을 찾은 김재원 관장은 참상을 목격하고는 망연자실했다.

“관원 전원이 동원되어 무너지거나 대파된 창고들을 파헤치고 유물의 파편들을 모았다. 그러나 사실상 원형을 식별하기 힘든 것이 다수였다. 그 태반이 파편으로 남았거나 혹은 멸실됐다.”(‘첩보조사지시보고’)

유물정리작업은 1953년 7월 휴전 이후에도 무려 10년간 이어졌다. 박물관원들은 폭격 맞은 뒷자리 흙을 채로 쳐서 조그만 유물 파편 한조각에 이르기까지 수습했다. 비단 경복궁 내 박물관 뿐이 아니었다. 남산 기슭에 있던 국립과학관은 소장품 전체와 함께 소실되었고, 덕수궁 석조전 또한 폭탄을 맞아 내부가 전소했다. ‘첩보조사지시보고’에 따르면 최종 집계된 ‘전쟁으로 사라진 소장품 총수량’은 7109점에 달한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일이 있다. 북한군 치하에서 국립박물관의 국보급 핵심소장품들을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로 옮긴 것이 결과적으로 ‘신의 한수’가 됐다는 것이다. 덕수궁 석조전 역시 피격했지만 미술관 지하창고는 멀쩡했던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국보급 핵심유물을 시외곽으로 분산하라는 북한 기관의 명령도 그랬고, 그 명령에 따르지 않고 덕수궁미술관 지하창고를 고집한 박물관원들의 판단도 그랬다. 가령 서봉총·금령총 금관과 두 구의 반가사유상 등을 옮기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는가. 생각할수록 모골이 송연할 따름이다.

미국정부의 소극적인 반응에 비해 하와이 호놀루루 예술원이 한국문화재의 이송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51년 3월5일 호놀루루 예술원은 한국문화재를 호놀루루 박물관으로 옮기고 김재원 관장이 이를 관리할 것을 제의했다.| 김리나의 논문에서
■한국문화재의 부산피란을 진두지휘한 미국인

그렇게 우여곡절을 겪은 문화유산은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다시 고비를 맞는다. 11월 말 전황이 심각해졌을 때 김재원 관장에게 “박물관 소장 유물을 소개하는 게 좋겠다”고 귀띔해준 이가 있었다. 바로 부산에 있던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인 유진 크네즈(1916~2010)였다.

김재원 관장은 당시 백낙준 문교부장관을 세 번이나 찾아가 “박물관 유물을 옮기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마침내 대통령의 재가를 받은 문교부장관은 11월30일 정식 공문 대신 영문 편지 형식으로 ‘유물의 피란’을 허가했다. 관공서의 정식공문이라면 서기-계장-과장-차관 등 모든 계통의 관리가 열람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정부가 박물관 유물을 소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시민들이 동요할 수 있기 때문에 영문 편지 형식을 빌려 비밀수송작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부산으로 갈 수송수단이 없었다.

김재원 관장이 연합군 총사령부에 “수송수단 좀 제공해달라”는 편지를 보냈지만 묵살당했다. 결국 김 관장은 “유물을 옮기라”고 귀띔해준 크네즈 미국공보원 한국지부장에게 매달렸다. 크네즈는 “(주한 미국대사인) 존 무초(1900~1991)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돌려보냈다. 그러나 김관장의 두번째 방문을 받고 결심을 굳힌다.

“철수의 책임을 내(크네즈)가 개인적으로 지기로 했다. 한국유물이 북한군 수중에 들어가거나 더 나쁜 일이 생긴다면 극심한 비난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확신했다.”(크네즈의 <한 이방인의 한국사랑>·1997)

1951년 7월9일 이승만 대통령이 문교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 “호놀루루 예술원이 자비로 한국문화재를 반출 보관하겠다는 제의도 했고, 전시도 하겠다니 호놀루루로 문화재를 옮기라”는 지시가 담겨있다.|국가기록원 제공
크네즈는 미국 대사관의 허락없이 국립박물관과 덕수궁미술관 소장 유물의 ‘비밀소개작전’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다. 만약 발각된다면 직위가 박탈될 수 있었다. 기왕 한국측을 돕기로 마음 먹은 이상 분주히 움직였다.

우선 미군 군용열차가 전쟁물자를 하역한 뒤 빈차로 부산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에 착안했다. 크네즈는 해방후 미군정 시절 교화국장을 지낸 예비역 대위였다. 그 신분을 이용해 열차를 징발했고, 대사관 트럭을 임시로 빌려 유물들을 열차로 옮겨 실어날랐다(12월 7일). 피란대열에는 국립박물관(소장품 83상자) 및 덕수궁미술관(155상자) 소장품 외에도 서울대 도서관 소장 <승정원일기> 3045책 등 규장각 도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특기할만한 일이 있다. 이 유물들을 따로 포장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 또하나의 아이러니다. 왜냐면 유물들이 적 치하에서 북한의 명령을 받고 포장해놓은 채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유물을 실은 열차는 나흘만에 부산에 도착했다. 다른 열차에게 수시로 길을 내줬고, 공산군의 공격이 의심될 때는 두어시간씩 멈춰서는 일이 다반사였다. 여기서도 크네즈의 역할이 빛났다. 모든 검문소마다 전화를 걸어 열차의 안전이동을 확인했고, 그 자신 군용기를 타고 부산까지 와서 유물의 무사도착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재미교포 이대수씨가 기증한 조선의 국새 ‘대군주보’. 미국인인 듯한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하다. 고종이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을 즈음 청나라와의 사대주의를 청산 하고 자주외교를 펼치겠다는 의지로 제작한 국새다. 그러나 한국전쟁 즈음 미국인인 W B. Tom 이 어떤 경로인지는 모르지만 이 국새를 수중에 넣어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 것으로 보인다.|국립고궁박물관 제공
■오타니 컬렉션까지 구했다

이렇게 중요유물을 무사히 옮긴 김재원 관장에게 한 가지의 숙제가 더 남아있었다.

일본 승려 오타니 고즈이(大谷光瑞·1876~1948)가 약탈·수집해온 360여건 1500여점의 ‘중앙아시아 유물’(오타니 컬렉션)을 서울에 두고 온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중 60여점의 벽화가 핵심이었다. 그러나 1차 수송 때는 가져올 엄두도 내지 못했다. 수백년~1000년 이상 토벽 위에 그린 그림이라 트럭 및 열차 수송 중 충격을 받는다면 파손될 위험이 농후했기 때문이다. 독일유학파인 김관장은 독일의 뼈아픈 예를 떠올렸다.

즉 알베르트 폰 르 코크(1860~1930)과 알베르트 그륀베델(1856~1935)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져온 벽화를 벽에 붙여둔 베를린 민속박물관이 제2차대전 중 공습을 받아 30%가 파손된 바 있다. 이때의 충격으로 박물관 벽화 책임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사실도 김관장은 잘 알고 있었다. 전전반측하던 김관장은 1951년 3월 말 국립박물관 소속 최순우와 덕수궁 미술관장인 이규필 등을 서울로 보내 ‘오타니 컬렉션의 부산 이송작전’을 벌였다.

최순우씨는 1·4 후퇴 후에도 홀로 박물관에 남아있던 수위 문억석씨와 함께 4주에 걸쳐 벽화를 뜯어 포장했다. 4월25일 덕수궁 미술관과 남산 분관(옛 국립민족학박물관)의 일부 소장품 등을 합해 미군트럭 3대분이 열차편으로 수송됐다. 이로써 국립박물관와 덕수궁미술관의 중요 소장품 430상자분 1만8883점이 무사히 부산으로 피란했다. 이후 김재원 관장에게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됐다. 한국에서 근무하다 귀국한 미국 외교관의 편지였다.

“내가 베를린의 영화관에서 방영된 소련측의 뉴스를 보았습니다. 서울의 텅 빈 국립박물관 진열실을 보여주면서 ‘미국 침략자들이 한국의 국보를 송두리째 약탈해갔다’고 극렬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뉴스를 보고 나는 ‘아! 한국박물관 직원들이 문화재를 무사히 옮겼구나’하고 안도했습니다.”

최근 환수된 강원 속초 신흥사 ‘영산회상도’. 38선 이북에 속한 속초는 한국전쟁 때 수복지역이어서 1951년 8~54년 11월까지 미군정이 실시된 곳이다. 이 와중에 신흥사 불화가 6개의 조각으로 나눠져 미군에 의해 반출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계종 제공

■한국 문화재 몽땅 하와이 갈뻔한 사연

또하나 흥미로운 것은 유물의 ‘제2차 미국 소개 계획’도 추진중이었다는 사실이다. 김재원 관장은 중국군의 공세가 치열할 때인 1950년 12월2일 연합군 총사령부의 민간교육정보국에 “비상상황에…귀중한 문화재들을 국외로 반출하기를 원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미국무부는 비용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했다. 미국정부로서는 ‘피란을 핑계로 문화재를 약탈한다’는 구 소련 등 공산권의 비난을 감수하기 어려웠다.

미국 정부는 그 대안으로 일본을 지목했다. 그러나 당시의 정서로는 한국문화재의 일본 피란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 와중에 미국 하와이 호놀루루 예술원이 “우리가 받아주겠다”고 나섰다. 호놀루루 예술원은 “유물의 운송비용을 책임질 뿐 아니라 전시회도 추진할 것”이라고 적극 나섰다. 하지만 이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다. 1951년 7월10일부터 정전회담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는 박물관 유물이 다칠 위험은 희박해졌다.

‘영산회상도’는 1954년 6월까지는 신흥사에 봉안돼 있다가 어느 시기에 사라졌다. 미국 통신장교 폴 뷰포드 팬처가 1953~1954년 5월 사이 쵤영한 사진(왼쪽)에는 불화가법당에 봉안되어 있는데, 해병대 장교 리처드 브루스 락웰이 1954년 10월 무렵 찍은 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 제공·속초시립박물관 소장
■7000여점 잃고 중요유물 1만8880여점 지켰다

“남한과 북한이 같은 민족인데 왜 유물이 북한으로 가는 것에 그렇게 부정적이냐.”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1회 국제청방패위원회에서 ‘한국전쟁 시기 문화재 피란사’를 발표한 김리나 홍익대 명예교수에게 한 미국인이 던진 질문이다. 김교수는 뜻밖 질문에 한참 생각하다가 “당시 북한은 공산국가로 적국의 위치에 있었다”고 답했단다. 하기야 외국인으로서는 ‘같은 민족이라면서 문화재가 남에 있으면 어떻고, 북에 있으면 어떠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또 ‘굳이 자기네 나라 문화재를 다른 나라(미국)로 피신시킬 필요가 있었냐’고 의문을 던질 수도 있겠다.

그러나 어찌 외국인들이 1950년에 벌어진 동존상잔의 비극과 그 이후 70년간 이어진 갈등과 반목을 이해할 수 있겠는가. 만약 1950년 9월 문화유산들이 북한의 수중으로 넘어갔다면 어찌 되었을까. 지금까지 70년간 그 문화유산을 향유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언제까지 기약없는 세월을 보내야 할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또 달리 생각해보면 전쟁이 일어나 포격과 폭격이 난무하는데 문화유산 담당자들이 나몰라라 제 몸만 피할 수 있는가. 어떤 경우든 문화유산을 가장 안전한 곳으로 옮겨놓아야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전쟁은 피아를 가리지 않는다. 불가피하게 문화유산을 그대로 두었던 결과는 어떠했는가. 적군이 아닌 아군의 폭격으로 수많은 문화재들이 부서졌거나 사라졌다. 경복궁 내 전각과 박물관 유물은 대표적인 예에 불과하다.

남묘(서울 동작구 관왕묘), 벽제관, 수원 화성, 촉석루, 봉선사, 송광사, 내장사, 월정사, 건봉사 등이 주로 미군과 한국군에 의해 불에 탔거나 파괴됐다. 특히 전국의 사찰 31곳이 전소됐다. 종묘에 안치되어 있던 조선의 국새와 어보가 미군에게 무단 반출되고, 전국의 사찰에 소장되어 있던 경판과 불화들이 땔감으로 불에 태워졌거나 전리품으로 뜯겨져 나갔다.

‘W B. Tom’의 서명이 선명한 조선 고종의 국새와, 6조각으로 무자비하게 잘려 반출된 ‘신흥사 영산회상도’가 상징적이다. 물론 이 유물들은 천신만고 끝에 귀환했지만 지금 이 순간 한국전쟁의 와중에 무단 반출된 유물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전쟁의 참화 속에서 2만점에 가까운 문화유산을 지켜낸 박물관 직원들의 분투는 청사에 길이 빛난다. 김재원 초대박물관장의 언급이 심금을 울린다.

“내 일생에서 가장 자랑할만한 일이 있다면 우리 직원들과 함께 동산문화재 거의 전부를 전쟁의 와중에서 무사히 보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이 기사를 쓰는데 장상훈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깊이있는 조언과 많은 자료를 제공해주었습니다. 또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의 미국반출목록(1950년)을 정리해서 보내준 국립경주박물관 김보경 주무관의 도움도 컸습니다. 강임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협력지원팀장도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애플이 2분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구매목표 미달로 삼성전자에 1조원이 넘는 보상금을 지불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진=박흥순 기자

애플이 2분기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구매목표 미달로 삼성전자에 1조원이 넘는 보상금을 지불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13일(현지시간) 미국 IT전문매체 애플인사이더는 디스플레이 전문 시장조사업체 DSCC의 보고서를 인용해 애플이 삼성전자와 약속한 OLED 물량을 구입하지 않아 9억5000만달러(약 1조1428억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2분기 예상 영업이익으로 8조1000억원을 공시했다. 이는 당초 시장의 전망치인 6조~7조원을 뛰어넘는 깜짝 실적으로 애플의 보상금이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 다만 보상금의 규모에 대해서는 그동안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애플은 통상 거래 기업에 일정수준의 물량 구입을 약속하며 전용라인을 운영한다. 대신 발주물량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보상금 명목으로 일정금액을 애플이 보장한다. 애플인사이더는 애플이 2분기 삼성전자에 구입한 물량은 약 7억4970만달러(약 9019억원) 수준이라고 분석했다.

애플이 OLED 구매목표에 미달한 배경으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판매 부진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이 매체는 애플이 지난해에도 구매목표 미달로 삼성전자에 약 6억8300만달러(약 8216억원)을 지급한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했다.

[머니투데이 박광범 기자]

사진=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 페이스북 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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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행정1부시장을 역임하는 등 박원순계로 분류되는 윤준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피해호소인의 가짜 미투 의혹을 제기했다.

윤 의원은 13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고소인 법률대리인 측의 기자회견이 오늘 오후에 있었습니다만, 행정1부시장으로 근무하면서 피해자를 보아왔고 시장실 구조를 아는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내용들이 있었다”며 “침실, 속옷 등 언어의 상징조작에 의한 오해 가능성에 대처하는 것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고 밝혔다.

그는 박 시장이 극단적 선택을 한 이유에 대해선 “이제 고인이 되셨기 때문에 직접 여쭤볼 수가 없어서 그저 추론을 해볼 수밖에 없다”며 “박원순 시장님은 누구보다도 성인지 감수성이 높은 분이셨다고 기억한다. 순수하고 자존심이 강한 분이시라 고소된 내용의 진위여부와 관계없이 고소를 당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주변에 미안함을 느꼈을 것 같다”고 했다.

이어 “이후에 전개될 진위여부에 대한 정치권의 논란과 논란 과정에서 입게 될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등을 방지하기 위해서 죽음으로서 답하신 것이 아닐까”라고 적었다.

그는 또 “고인의 명예가 더 이상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그러나 비정한 정치권, 특히 미래통합당에서 피해자의 2차 피해 여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하이에나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질 것 같다”고 덧붙였다.

KT의 ‘천재타자’ 강백호는 올해 홈런 5개만 더 보태면 만 21세 이하 타자 최다홈런의 주인공이 된다. 이승엽, 심정수, 김태균 등 전설들을 제치고 맨 위에 선다. 전설들의 반열에 또다시 자신의 이름을 추가하는 강백호다. 스포츠동아DB
강백호(21·KT 위즈)가 이력서를 쓴다면 취미는 ‘전설소환’, 특기는 ‘기록격파’가 가장 잘 어울릴 듯하다. KBO리그 39년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만 21세 이하 타자의 길을 우직하게 걷고 있기에 과한 수식어가 아니다. KT를 넘어 한국야구의 중심으로 자리매김 중이다.

남달랐던 첫인상의 여운은 여전히 짙다. 2018년 데뷔한 강백호는 12일까지 통산 298경기서 타율 0.313, OPS(출루율+장타율) 0.912, 54홈런, 183타점을 기록했다. 올 시즌으로 범위를 좁혀도 타율 0.323, OPS 1.012, 12홈런의 맹타다. 아직 시즌이 80경기 넘게 남았음을 고려하면 개인 한 시즌 최다 홈런(2018년 29개) 경신이 확실시된다.

생애 첫 시즌 30홈런 고지에 올라선다면 대기록이 추가된다. 역대 만 21세 이하 타자의 홈런 순위 1위는 김태균(한화 이글스·58개)이며 그 뒤로 강백호와 이승엽(은퇴·이상 54개)이 나란히 있다. 앞으로 5홈런만 더 보태면 역대 만 21세 이하 최다홈런의 주인공은 강백호로 바뀐다. 그 아래를 살펴봐도 김재현(47개), 심정수(42개·이상 은퇴), 최정(SK 와이번스, 김하성(키움 히어로즈·이상 41개) 등 거물들의 이름이 가득하다. 역사로 가는 길의 종착지에 임박했다는 의미다.

첫 걸음부터 역사였다. 강백호는 2018시즌 개막전이었던 3월 24일 광주 KIA 타이거즈전 3회 첫 타석에서 전년도 다승왕 헥터 노에시를 상대로 솔로포를 때려냈다. 신인의 데뷔 첫 타석 홈런은 역대 6번째였는데, 개막전 데뷔 타석에서 고졸신인이 홈런을 친 것은 강백호가 최초였다. 이후 고졸신인 최초 3연타석 홈런, 고졸신인 시즌 최다 홈런(29개)을 썼다.

올해 6월 17일 인천 SK전에선 통산 276경기 만에 50홈런 고지에 등정했다. 만 20세 1개월 19일만으로 종전 이승엽(만 21세 19일)의 기록을 넘어섰다. 당시 강백호는 “이승엽 선배님과 비교된다는 자체가 기쁘다”는 소감을 밝혔다. 이처럼 강백호가 깨버린 기록만 해도 벌써 한 손으로 꼽기 어렵다.

국가대표 거포 1루수의 계보를 이을 수 있기에 한국야구에도 든든한 자산이다. 비록 대회 자체가 연기됐지만 올해 발표됐던 2020도쿄올림픽 예비 엔트리 1루수 명단에는 박병호(키움), 오재일(두산 베어스), 이대호(롯데 자이언츠), 김태균 등 30대뿐이었다. 유일한 20대 최지만(29·탬파베이 레이스)의 합류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강백호는 당시 외야수로 이름을 올렸지만 현재 포지션 전향에 완벽히 성공했다.

이강철 KT 감독은 “(강)백호가 조금 힘들 때 멜 로하스 주니어, 유한준 등 앞뒤 타자들이 잘해주고 있어 걱정이 덜하다”며 “백호가 슬럼프를 이겨내 4번 타순에 자리잡아주는 게 가장 좋다. 백호 스스로도 이걸 이겨내야 국제대회에서도 경쟁력이 있다”며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강백호의 취미와 특기가 계속된다면 KT의 5강 확률도 그만큼 높아질 수밖에 없다.

[스타뉴스 심혜진 기자]손흥민./AFPBBNews=뉴스1중국이 토트넘 핫스퍼 손흥민(28)과 자국 스타 우레이(29·에스파뇰)를 비교하며 한탄했다. 실력 차이를 한 번 더 인정했다.

중국 시나스포츠는 13일(한국시간) “전날 밤과 오늘 새벽 우레이는 한국의 형제보다 평가가 나쁘다.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격차인가”라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우레이의 소속팀 에스파뇰은 지난 12일 에이바르에 0-2로 패배했다. 우레이는 후반 26분 교체 출전 기회를 잡았지만 슈팅을 하나도 때리지 못했다. 당연히 평점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매체는 “우레이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이 팀 내 최저 4점을 받았다.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미 우레이는 강등이 확정된 상황. 시나스포츠는 우레이에 대해 “다음 시즌에 팀에 남을지 떠날 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는 중국 축구의 희망이다”고 애써 포장했다.

우레이./AFPBBNews=뉴스1
하지만 손흥민의 활약에 다잡은 마음까지도 무너졌다. 손흥민과 실력 차를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손흥민은 아스널전에 선발 출격해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에 앞장섰다. 이로써 손흥민은 시즌 10골-10도움 고지도 밟았다.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다. 동시에 4시즌 연속 두 자리 득점도 달성했다.

시나스포츠는 “손흥민은 1골 1도움 외에도 3차례 크로스를 더 성공시켰고, 19번의 정확한 패스를 했다. 그리고 3개의 키패스를 기록했다. 이제 손흥민은 토트넘의 주축 스트라이커가 됐다. 유럽 5대 리그서 그가 쌓아온 업적은 대단하다”고 높게 평가한 뒤 “손흥민에 비하면 우레이는 갈 길이 멀다”고 한탄했다.
[스타뉴스 심혜진 기자]손흥민./AFPBBNews=뉴스1중국이 토트넘 핫스퍼 손흥민(28)과 자국 스타 우레이(29·에스파뇰)를 비교하며 한탄했다. 실력 차이를 한 번 더 인정했다.

중국 시나스포츠는 13일(한국시간) “전날 밤과 오늘 새벽 우레이는 한국의 형제보다 평가가 나쁘다.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격차인가”라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우레이의 소속팀 에스파뇰은 지난 12일 에이바르에 0-2로 패배했다. 우레이는 후반 26분 교체 출전 기회를 잡았지만 슈팅을 하나도 때리지 못했다. 당연히 평점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매체는 “우레이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이 팀 내 최저 4점을 받았다.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미 우레이는 강등이 확정된 상황. 시나스포츠는 우레이에 대해 “다음 시즌에 팀에 남을지 떠날 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는 중국 축구의 희망이다”고 애써 포장했다.

우레이./AFPBBNews=뉴스1
하지만 손흥민의 활약에 다잡은 마음까지도 무너졌다. 손흥민과 실력 차를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손흥민은 아스널전에 선발 출격해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에 앞장섰다. 이로써 손흥민은 시즌 10골-10도움 고지도 밟았다.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다. 동시에 4시즌 연속 두 자리 득점도 달성했다.

시나스포츠는 “손흥민은 1골 1도움 외에도 3차례 크로스를 더 성공시켰고, 19번의 정확한 패스를 했다. 그리고 3개의 키패스를 기록했다. 이제 손흥민은 토트넘의 주축 스트라이커가 됐다. 유럽 5대 리그서 그가 쌓아온 업적은 대단하다”고 높게 평가한 뒤 “손흥민에 비하면 우레이는 갈 길이 멀다”고 한탄했다.
[스타뉴스 심혜진 기자]손흥민./AFPBBNews=뉴스1중국이 토트넘 핫스퍼 손흥민(28)과 자국 스타 우레이(29·에스파뇰)를 비교하며 한탄했다. 실력 차이를 한 번 더 인정했다.

중국 시나스포츠는 13일(한국시간) “전날 밤과 오늘 새벽 우레이는 한국의 형제보다 평가가 나쁘다. 이것이 중국과 한국의 격차인가”라며 아쉬움을 곱씹었다.

우레이의 소속팀 에스파뇰은 지난 12일 에이바르에 0-2로 패배했다. 우레이는 후반 26분 교체 출전 기회를 잡았지만 슈팅을 하나도 때리지 못했다. 당연히 평점이 낮을 수 밖에 없다. 매체는 “우레이를 비롯해 몇몇 선수들이 팀 내 최저 4점을 받았다. 스페인 언론으로부터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미 우레이는 강등이 확정된 상황. 시나스포츠는 우레이에 대해 “다음 시즌에 팀에 남을지 떠날 지 여부에 관계없이 그는 중국 축구의 희망이다”고 애써 포장했다.

우레이./AFPBBNews=뉴스1
하지만 손흥민의 활약에 다잡은 마음까지도 무너졌다. 손흥민과 실력 차를 다시 한 번 깨달은 것이다. 손흥민은 아스널전에 선발 출격해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2-1 승리에 앞장섰다. 이로써 손흥민은 시즌 10골-10도움 고지도 밟았다. 프리미어리그 아시아 선수로는 최초다. 동시에 4시즌 연속 두 자리 득점도 달성했다.

시나스포츠는 “손흥민은 1골 1도움 외에도 3차례 크로스를 더 성공시켰고, 19번의 정확한 패스를 했다. 그리고 3개의 키패스를 기록했다. 이제 손흥민은 토트넘의 주축 스트라이커가 됐다. 유럽 5대 리그서 그가 쌓아온 업적은 대단하다”고 높게 평가한 뒤 “손흥민에 비하면 우레이는 갈 길이 멀다”고 한탄했다.

“서울시청 내부자 제보…경찰 수사기밀 누설, 검찰로 넘겨야”… 성추행 진상·비서실 은폐 여부·수사사건 누설 정조준“피해자 호소 묵살, 심각한 인권침해 발생”
“책임자 등 수사상황서 명백히 밝혀져야”

박원순 서울시장. 서울신문DB주호영 미래통합당 원내대표가 14일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전직 비서 성추행 의혹과 관련해 “서울시장 비서실 차원에서 (박 전 시장의) 성추행 방조 또는 무마가 지속해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주 원내대표는 이날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에서 “서울시청 내부자들로부터 우리 당에 들어온 제보”라며 이렇게 밝혔다.

그는 “서울시장 개인의 위계에 의한 성추행이 이뤄짐과 동시에, 시장 비서실 내나 유관 부서에서 피해자(전직 비서)의 호소를 묵살하는 심각한 인권침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주 원내대표는 “제보가 사실이라면 지난 4년간 서울시장 비서실장 자리를 거쳐 간 분들, 젠더 특보, 이런 분들 역시 직무 감독을 소홀히 한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수사 과정에서 명백히 밝혀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1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를 주재 했다. 2020.7.14 김명국선임기자 daunso@seoul.co.kr“서울경찰청, 수사기밀 누설…수사대상 전락”

“檢, 특임검사 임명이나 특수본 설치해
성추행 진상 밝히고 책임자 엄벌해야”

주 원내대표는 경찰이 이번 사건의 수사상황을 청와대에 보고한 것과 관련해 “서울지방경찰청은 수사기밀 누설로 이미 수사 대상으로 전락했다”면서 “빨리 박원순 관련 수사를 중단하고 사건을 조속히 검찰로 송치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검찰은 특임검사를 임명하거나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해 성추행 사건의 진상을 밝힐 뿐 아니라 비서실의 은폐 여부, 수사기밀 누설 등도 철저히 밝히고 책임 있는 사람을 엄벌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전 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한 박 전 시장의 전직 비서 A씨는 지난 13일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 힘들었던 심경을 밝혔다.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이 대독한 A씨 서신에서 사과 없이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전 시장에 대해 “용기를 내 고소장을 접수하고 밤새 조사를 받은 날, 저의 존엄성을 해쳤던 분께서 스스로 인간의 존엄을 내려놓았다”면서 “거대한 권력 앞에서 힘없고 약한 저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공정하고 평등한 법의 보호를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낸 것이라고 공개한 비밀대화방 초대문자 –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열린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에서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변호사가 박원순 시장이 고소인에게 보낸 것이라며 비밀대화방 초대문자를 공개하고 있다. 2020.7.13 연합뉴스박원순 전 비서, 기자회견서 압박 토로
“그때 느꼈던 위력, 다시 느껴 숨막혀”

특히 A씨는 “많은 분들에게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많이 망설였다”면서 “그러나 50만명이 넘는 국민들의 호소에도 바뀌지 않는 현실은 그때 느꼈던 위력의 크기를 다시 한번 느끼고 숨이 막히게 한다”며 성추행 당시 은폐 정황을 에둘러 표현했다.

A씨의 변론을 맡은 김재련 변호사는 A씨가 당했던 피해사실들을 일부 공개했다.

김 변호사는 “범행은 피해자가 비서직을 수행하는 4년 동안, 그리고 다른 부서로 발령이 난 이후에도 지속됐다”면서 “범행 발생 장소는 시장 집무실과 집무실 내 침실 등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상세한 방법은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피해자에게 ‘둘이 셀카를 찍자’며 피해자에게 신체를 밀착하거나, 무릎에 나 있는 멍을 보고 ‘호’해주겠다며 무릎에 자신의 입술을 접촉했다”면서 “집무실 안 내실이나 침실로 피해자를 불러 ‘안아달라’고 신체적 접촉을 하고, 텔레그램 비밀 대화방에 초대해 지속적으로 음란한 문자나 속옷만 입은 사진을 전송해 피해자를 성적으로 괴롭혀왔다”고 주장했다.

– 12일 서울시청인근에서 한 시민이 박원순 서울시장의 서울특별시장에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있다. 2020.7.12 박지환기자 popocar@seoul.co.kr

‘우리는 피해자와 연대’ – 13일 서울 은평구 한국여성의전화 교육관에서 ‘서울시장에 의한 위력 성추행 사건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박원순 서울시장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고소한 고소인 측은 이날 기자회견을 열고 위력에 의한 박 시장의 성추행이 4년 동안 지속적으로 이뤄졌다고 주장했다. 2020.7.13/뉴스1

공수처 추천위원에 ‘n번방’ 변호인 임명에
“공수처, 급하게 먹다가 체했다” 與 비판

한편 주 원내대표는 더불어민주당이 임명했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 처장 후보 추천위원이 ‘n번방’ 사건 조주빈의 공범을 변호했던 사실이 드러나 사퇴한 데 대해 “급하게 먹다가 체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과연 공수처를 출범시키는 게 맞는 건지, 출범하더라도 공수처장을 어떤 분으로 할 건지, 어떤 절차를 거쳐서 할 건지 다시 한번 깊이 성찰하고 태도를 바꾸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민주당 몫 공수처 처장 후보 추천위원으로 선정된 장성근 전 경기중앙변호사회 회장은 전날 ‘n번방’ 조주빈의 공범인 강모씨의 변호를 맡은 것으로 알려지자 위원직을 사임했다.

강씨는 지난해 12월 조씨에게 자신의 고등학교 담임 교사 A씨의 딸에 대한 살인을 청부, 개인정보를 알려주고 금액을 지급한 혐의로 지난 1월 구속됐다.

당시 사회복무요원이었던 강씨는 또 조씨에게 박사방 피해자의 개인정보를 건네는 등 공범 역할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씨는 2018년 담임교사 A씨에 대한 상습 협박, 스토킹 혐의로 징역 1년 2월을 선고받고 복역하기도 했다.

두 사건의 변호는 모두 장 전 회장이 맡았다. 장 전 회장은 언론 인터뷰에서 “딸이 어린 시절 정신과 진료를 받았는데, 당시 안면을 튼 의사가 강씨의 부모님을 소개해줬고 스토킹 사건의 변호를 맡았다”고 밝혔다. 또 “두 번째 변호를 맡을 시점에도 뒤늦게 (이 사건이) n번방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서 “그러나 (강 씨) 부모와 막역한 사이고, 변호사의 소명에 따라 사건을 맡기로 결정했다”고 밝힌 뒤 강씨 사건에 대한 사임계를 내기로 결정했다고 전했다.

– 미래통합당 주호영 원내대표가 14일 국회에서 열린 원내대책회의를 주재 했다. 2020.7.14 김명국선임기자 daunso@seoul.co.kr

– 지난 9일 공관을 나와 연락이 두절된 박원순 서울시장이 숨진 채 발견됐다. 사진은 박 시장이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3선 고지에 오른 다음 날 서울현충원을 참배하는 모습. 연합뉴스

‘최저임금 1만원’ 공약 내걸고 집권 초기 최저임금 인상 드라이브 걸었던 문재인 정부 / 역설적이게도 가장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 기록 남기게 될 듯

13일 오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제8차 최저임금위원회 전원 회의가 열리고 있다. 근로자위원 9명 중 민주노총 위원 4명은 지난회의 때 경영계가 최저임금 삭감안을 제시하자 이에 반발, 이날 회의에 불참했다. 세종=연합뉴스

내년도 최저임금이 시급 기준으로 올해(8590원)보다 130원(1.5%) 오른 8720원으로 14일 결정됐다.

이는 국내 최저임금제도를 처음 시행한 1988년 이후 가장 낮은 인상률이다.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내걸고 집권 초기 최저임금 인상 드라이브를 걸었던 문재인 정부가 역설적이게도 가장 낮은 최저임금 인상률 기록을 남기게 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경제 위기가 초래한 결과로 볼 수 있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는 처음부터 코로나19 사태가 결정적인 변수로 작용했다.

박준식 최저임금위원장은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시작한 지난달 11일 1차 전원회의에서 코로나19 사태를 ‘전무후무한 상황’으로 규정하며 최저임금 심의도 그만큼 큰 의미를 띠게 됐다고 강조했다.

경영계는 코로나19 사태로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이 한계 상황에 도달했다며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을 더는 버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경영계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인건비 부담 더는 버틸 수 없다”

올해 적용 중인 최저임금 인상률(2.9%)은 역대 세 번째로 낮은 수준이지만, 문재인 정부 초기인 2018년과 2019년 최저임금이 각각 16.4%, 10.9% 올라 이미 과도하게 높은 수준이라는 게 경영계의 입장이다. 2018년부터 올해까지 3년 동안 최저임금 인상률은 32.8%에 달한다.

경영계는 국제통화기금(IMF)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1%로 예상한 점 등을 거론하며 ‘마이너스’ 성장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제기했다. 이를 토대로 내년도 최저임금의 삭감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노동계도 코로나19 사태를 핵심 변수로 고려했지만, 결론은 정반대였다.

코로나19 사태로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가 어려워진 만큼, 사회 안전망인 최저임금 인상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노동계는 주장했다.

최저임금 인상으로 소비가 활성화하면 경제 회복도 탄력을 받을 수 있다는 게 노동계의 입장이다.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맥락의 주장으로 볼 수 있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의 어려움도 최저임금 인상이 아니라 재벌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에 따른 것이라고 노동계는 지적했다. 대·중소기업의 불공정거래 완화로 해결해야지, 최저임금 인상 억제로 접근할 문제는 아니라는 주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정해진 것은 결국 경영계의 주장이 힘을 얻은 결과로 볼 수 있다.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 역대 최저 수준…쉽게 납득하기 어려워 논란일 듯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결정된 것은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대목인 게 사실이다.

내년도 최저임금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역대 최저 수준의 인상률을 기록한 것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인 1998년(2.7%)이다.

IMF 외환위기 당시 고용 충격은 코로나19 사태의 충격보다 훨씬 심했던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분석 결과에 따르면 코로나19 사태 첫 3개월인 올해 3∼5월 국내 취업자 감소 폭은 87만명으로, IMF 외환위기 첫 3개월인 1998년 1∼3월의 103만명에는 못 미친다.

그러나 IMF 외환위기 때는 대기업 중심의 구조조정으로 정규직 노동자가 대량 해고로 내몰렸지만, 코로나19 사태의 고용 충격은 비정규직, 임시·일용직, 특수고용직 등 취약계층에 집중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주로 받는 사람도 이들이다.

내년도 최저임금 심의를 주도한 공익위원들도 이 부분에 주목한 것으로 보인다.

2018년 고용 지표의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주장은 정치적 의도에 따라 부풀려진 면이 있지만, 최저임금 인상이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한 영세 사업장의 감원 압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에는 전문가들이 대체로 동의한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저임금 노동자의 고용 유지를 우선 목표로 삼는다면 최저임금 인상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는 얘기다.

◆경영 불확실한 상황에 부닥친 기업들…가장 먼저 손대는 건 ‘인건비’

공익위원 간사인 권순원 숙명여대 교수는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들이 가장 먼저 조정하는 비용이 노동력인데 최저임금이 기대 이상으로 올랐을 경우 초래될 수 있는 노동시장의 일자리 감축 효과, 그것이 노동자 생계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훨씬 크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최저임금을 받는 저임금 노동자의 생계를 외면했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최저임금의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특히,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내년에도 확대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실상 동결 혹은 삭감과 같은 결과가 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저임금 산입범위가 확대되면 사용자는 실제 임금을 그만큼 덜 올려주고도 최저임금 위반을 면할 수 있게 된다.

2018년 최저임금법 개정으로 최저임금 산입범위에 들어가는 정기 상여금과 복리후생비는 단계적으로 확대돼 2024년에는 전액이 산입범위에 포함된다.

내년도 최저임금 인상률이 1.5%에 그침에 따라 문재인 정부의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은 실현 가능성에서 한층 멀어지게 됐다.FX마진거래

당초 현 정부의 공약은 최저임금을 올해까지 1만원으로 올린다는 것이었다. 이는 올해 적용할 최저임금을 의결한 지난해 심의에서 이미 물거품이 됐다.

◆2022년 최저임금 1만원 실현하려면 내년 심의에서 14.7% 올려야 가능

현 정부 임기 마지막 해인 2022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이 실현될 가능성도 크지 않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8720원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2022년 최저임금 1만원을 실현하려면 내년 심의에서 인상률이 14.7%가 돼야 한다.

코로나19 사태가 앞으로 최소 1∼2년 동안 계속될 것이라는 전망을 고려하면 내년 심의에서도 높은 인상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결국, 최저임금 1만원의 실현은 다음 정부의 과제로 넘어갈 공산이 커졌다.파워볼게임

현 정부가 출범과 함께 내건 최저임금 1만원 실현 공약은 2018년 고용 지표 악화가 최저임금 인상 탓이라는 여론에 밀린 데 이어 코로나19 사태라는 예기치 못한 국가적 위기를 맞아 좌초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결국 현 정부가 일관된 철학과 전략으로 노동 정책을 추진하지 못한 탓이라는 게 노동계의 시각이다.파워볼사이트

◆문 정부, 최저임금만 밀어붙여…결국 ‘을과 을’ 갈등 구도만 양산했다는 지적 피하기 어려워

최저임금 인상도 경제 민주화의 큰 틀에서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위한 정책과 맞물리도록 해야 했지만, 최저임금 인상만 밀어붙여 저임금 노동자와 자영업자의 ‘을과 을’의 갈등 구도가 만들어졌고 결국 여기에 발목이 잡혔다는 것이다.

이주호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정책실장은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현 정부의 각종 노동존중사회 정책은 ‘촛불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탄생했지만, 철학과 전략의 뒷받침이 없어 대체로 ‘용두사미’가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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